기록으로 나는 <타임머신> 국민청원 게시판 원조가 신문고? 상세내용(대체 텍스트)
기록으로 나는 <타임머신>
국민청원 게시판 원조가 신문고?
「조선왕조실록」- 1401년 7월 18일 대궐 중문 설치, 백성과 직접 소통
요즘의 청와대 '국민청원' 게시판과 견줄만한 신문고!
첫 번째 주인공은 지금주사(知錦州事) 안속이다.
태종실록 1401년 8월 13일
안속 : 참찬의정부사 조호에게 노비를 빼앗겼습니다. 억울하옵니다.
사헌부 신료 : 조사해보니 안속의 말이 옳구나.
조호 : 오판이오!
안속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어, 조호를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됐다.
신문고 초기에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.
태종실록 1402년 1월 26일, 의정부의 상소!
신료 : 전하, 의정부가 신문고 실명제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.
태종 : 어떤 사유이든 북을 먼저 치게 하여라.
1407년 11월 20일, 형조의 상소!
형조 신료 1 : 신문고 고발 사건까지 형조가 도맡다니...
형조 신료 2 : 맞습니다. 본연의 업무 수행도 버겁습니다.
이때까지 신문고는 전담부서 없이 사안에 따라 사건을 배정했다.
신문고가 설치된지 약 4개월 후
태종 : 얼마 전 설치한 신문고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?
신료 : 송나라에서 등문고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.
이때만 해도 왕과 신료들 모두 신문고가 얼마나 유용한 소통창구가 될지 몰랐던 것 같다.
1402년 1월 26일, 태종은 신문고 설치를 공식 공표했다.
백성1 : 억울한 일을 의정부에 호소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 북을 치면 된다고 하오!
백성2 : 맞소! 그런데 소송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북을 먼저 치거나, 무고, 모함을 하면 안된다고 하였소!
또한 집단민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.
태종실록 1403년 2월 26일, 갑사 500여 명의 청원
갑사 1 : 사헌부가 편파수사를 합니다.
3년 후, 조계종 승려 선민 등 승려 수백 명의 청원
승려 1 : 노비와 전답을 돌려주시오!
1411년 1월 11일, 사직 김득방 등 군졸 300여 명의 청원
군졸 1: 군량미 배급을 늘려주시오!
태종은 이 중 세 번째 청원만 받아주었다.
백성들의 청원을 막으려는 관료들의 횡포도 있었다.
세종실록 1428년 5월 24일
신료 : 왜 한밤중에 종을 치느냐?
백성 : 의금부 당직원이 막아 신문고를 칠 수 없었습니다.
정조 때는 북을 칠 수 없도록 높이 매달아 놓기도 했었다.
정조 : 당장 죄인을 찾아내고 북은 제자리에 갖다 놓아라.
정조는 궐 안에도 신문고를 설치하였고,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도 쳐 임금에게 직접 호소토록 하였다.
이후 신문고는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었고, 백성들은 언로가 막히면 벽서와 익명서 등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했다.
민심은 천심이니 흐르는 대로 두는 것이 순리이다.